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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

[잠깐!] 가을보리와 봄보리

시련의 두께가 인생의 깊이다

 

[경기남부뉴스 김정옥 기자] 남도 들녘의 겨울은 겉보기에 멈춰 있는 듯하지만, 그 차가운 흙 아래서는 치열한 생명의 사투가 벌어진다. 주인공은 바로 가을보리다. 대지의 온기가 가시기 전인 10월 말, 논밭에 뿌려진 가을보리는 영하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겨울을 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월동'이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다. 혹독한 추위를 통과하지 못한 보리는 결코 단단한 줄기를 세울 수도, 알찬 결실을 맺을 수도 없다. 가을보리의 서식지는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남부·중부 내륙 지역에서 주로 재배된다. 벼 수확 후 논이나 밭에서 파종하며, 10월 중하순~11월 초에 씨를 뿌려 이듬해 5~6월에 수확한다.

 

보리는 크게 가을보리와 봄보리로 나뉜다. 2월에 파종해 따스한 봄볕 아래서 자라는 봄보리는 성장이 매끄럽고 화려하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의 깊은 풍미를 닮은 쪽은 단연 가을보리다. 가을보리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제 몸의 수분을 스스로 줄이고 농도를 높이는 전략을 택한다. 생존을 위해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에만 집중하는 응축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 곁에는 봄보리처럼 탄탄대로를 걷는 이들도 있다. 고난 없는 성장과 시련 없는 성취는 겉보기에 매끄러워 보이지만, 삶의 진한 무게감을 느끼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반면, '가을보리 같은 인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특유의 단단한 조직감과 깊은 구수함이 배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어붙은 땅을 밀어 올리며 뿌리를 내린 시간들이 그 사람의 내면을 성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을보리의 맛이 유독 깊은 이유는 겨울을 추위 묵묵히 품어낸 시간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정면으로 스스로를 단련한 사람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품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을 갖게 된다. 시련 속에서 욕망을 비우고 자신을 비워 본 사람만이 작은 비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겨울을 난 보리만이 봄날 가장 먼저 청보리의 푸른 물결을 선사할 자격을 얻는다. 지금 당신의 삶이 매서운 겨울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면, 그것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맛이 깊이 들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시련의 두께가 인생의 깊이가 된다는 사실을 가을보리를 통해 보게 된다. 나의 멘토이신 그분의 삶을 통해, 나는 숱한 시련을 견뎌낸 가을보리의 깊은 맛을 느낀다.